기형도,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
가라, 어느덧 황혼이다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구름이여,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몇 점 노을이었다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(落下)하리라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!가라, 구름이여,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아아,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, 우리는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 더미 속에 있다. — 기형도,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
2015.02.14